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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77. <광양공>증자헌대부홍문관대제학휘상록포창문(贈資憲大夫弘文舘大提學諱相祿褒彰文)
1. 문헌 목록 〉22. 22世 〉79. <광양공>증홍문관제학휘상록효행비(贈弘文館提學諱相祿孝行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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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광양공>증홍문관제학휘상록묘갈명(贈弘文館提學諱相祿墓碣銘)
증홍문관제학휘상록묘갈명(贈弘文館提學諱相祿墓碣銘) 곡성(谷城)에 사는 조동혁(趙東爀) 군이 이분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이는 부모님의 지극한 행실을 기록한 행장인데 아직까지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이는 저의 죄입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불쌍히 생각하여 한 말씀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하여 나는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공의 휘(諱)는 상록(相祿), 자(字)는 여집(黎執), 호는 죽재(竹齋)로 벼슬은 홍문관제학을 제수하였다.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휘 원길(元吉)의 후손으로 우리 조선(朝鮮) 병자호란(丙子胡亂)때의 공신(功臣)인 휘 암(巖)의 十세손이며, 처사(處士) 휘 득명(得命), 휘 성순(成淳), 사복시정(司僕寺正) 휘 자옥(自玉), 증(贈) 승지(承旨) 휘 영흥(榮興) 이상이 고조 증고 조 고 사세(四世)이시며,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완산이씨(完山李氏)는 선비 이천백(李千白)의 따님이신데 순조(純祖) 신묘년(一八三一) 四월 三十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성(天性)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뛰어났는데, 일찍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날마다 빈소(殯所)에 가서 울부짖으며 돌아올 줄을 몰랐다. 조금 더 자라서는 집이 가난하였지만 열심히 농사를 지어 늙으신 아버님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데 힘을 다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날마다 개울에 나가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느라 손이 거북이등처럼 갈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백방으로 병구완을 하는데, 하루는 꿈에 신인(神人)이 약(藥)을 가르쳐 주어 효험을 보았으니, 그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았다.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고 三十리쯤 떨어진 곳에 장례를 지냈는데 날마다 가서 곡(哭)을 하면서 슬퍼하기를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 피하지 않았다. 세분 형과 동생 하나와 우애가 아주 남달랐다. 고종(高宗) 때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당해서 조정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자 의병 七十여 명을 모집하여 밤낮없이 서울로 달려갔으나 미처 도달하지 못하여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오고 말았는데, 본고장의 원님이 관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환영해 주었으니, 여기에서 충신(忠臣)은 효자(孝子)의 집안에서 구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징험할 수 있겠는데, 이런 사실은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에 실려 있다. 고종 무인년 九월 七일에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자헌대부(資憲大夫)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추증하였는데 옥천(玉川) 조장섭(趙章燮)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인 김성대(金聖大)의 따님이다. 평소 부덕(婦德)을 갖추시어 시어버이께 효성을 다하고 공(公)을 예의(禮義)로 받들었다. 공의 병환이 위독해져 고치기 어렵게 되자 하늘에 자기가 대신 죽기를 빌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었지만 효험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따라서 죽기를 맹세했으나 이를 안 집안 사람들이 구해내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마음을 고쳐 먹고 말하기를 「남편을 따라 황천(黃泉)으로 가는 것도 좋지만 고아가 된 아들을 잘 길러 집안을 일으키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삼년상을 잘 마쳤다. 아들을 의로써 가르치면서 항상 화기(和氣)를 잃지 않으셨으며 동서들 사이에도 네것 내것이 없이 서로 나누어 쓰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救濟)하니, 모두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래서 군(郡)과 도(道)에 여러 차례 천거되어 포상(褒賞)을 받았다. 고종 병신년(一八八四) 十一월 二十六일에 출생하여 고종 계묘년 四월 三十일에 돌아가셨는데, 묘소는 곡성군 오곡면 곤방산(崑方山) 아래에 있었는데, 후에 여천군 진월면 망덕산(望德山) 부도(孚屠) 해좌(亥坐)로 옮겼으며 연안인(延安人) 이병관(李炳觀)이 묘갈명을 지었다. 그의 아들 동혁이 공의 체백(體魄)이 편안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땅을 가려 열 여섯 차례나 길지(吉地)를 얻지 못하여 마침내 풍수지리에 관한 공부를 하여 마침내 좋은 자리를 얻어 안장(安葬)하였다. 아들 둘은 동섭(東燮)과 동혁(東爀)이요, 손자 정훈(定勲) 병훈(秉勲) 길훈(佶勲) 광훈(光勲) 방훈(昉勲)은 큰아들 소생이요, 경훈(炅勲) 창훈(昌勲) 충훈(忠勲) 명훈(明勲) 상훈(尚勲)은 작은 아들 소생이다. 증손 태익(翼)은 정훈의 소생이요, 치익(致翼) 주익(周翼)은 병훈의 소생이요, 재익(宰翼)과 종익(宗翼)은 길훈의 소생이요, 윤익(閏翼) 경익(庚翼) 하익(河翼) 순익(淳翼)은 광훈의 소생이요, 성익(性翼) 원익(元翼) 환익(煥翼)은 방훈의 소생이요 관익(官翼) 화익(和翼) 근익(根翼)은 경훈의 소생이요, 환익(桓翼) 해익(海翼)은 창훈의 소생이요, 내익(來翼) 광익(桄翼) 수익(洙翼)은 충훈의 소생이요, 백익(栢翼)은 명훈의 소생이요, 순익(栒翼) 승익(昇翼)은 상훈의 소생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훌륭한 행실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었으며, 독실한 행동은 마침내 인(仁)을 이루어 아내와 자식들이 이를 본받아 화기애애하고 집안의 규율이 엄숙하였다. 인륜(人倫)을 부축하고 기상을 바로잡은 것이 一백세 동안에 공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공이 돌아가신 지 五十여 년이 지났는데도 공이 남기신 아름다운 향기가 아직까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전하니, 그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 기릴 만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남쪽 고을에 효자와 열녀의 이름 높았으니 赫名南州 夫孝婦烈 귀신을 감동시켜 약 얻어 그 효과 아주 컸네 藥驗感神 如索付物 훌륭한 집안의 덕망이 서리처럼 깨끗하고 賢梱配德 永霜之潔 법도와 충성심 겸하여 백세의 높은 절개이네 矩兼敵愾 百世高節 丙寅年(一九二六) 上旬에 崇祿大夫 禮曹判書 原任奎章閣提學 安東 金宗漢 지음 아들 東爀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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